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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다이머 일상大공개

[기고] 아들과 함께한 산행길 - 사이버다임 백경래 부사장

원문 작성일: 2009/05/13 11:34

 

 

말에 샤워를 하다가 옆으로 돌아서니, 불뚝 솟은 뱃살이 유독 눈에 거슬린다. 운동을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 순간 자괴감이 밀려온다. 안되겠다. 산이라도 가자. 혼자 가려고 하니 왠지 심심하다. 순간 아들 놈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오랜만에 아들 놈과 같이 산에 가야겠다.

 

아들은 그 나이 아이들이 그렇듯이 라면을 좋아한다. 하지만 라면은 깐깐한 아내가 쉽게 허락하지 않는 식품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에서는 잘 팔지 않지만 웬만한 동네 산에는 컵라면을 파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아들도 경험상 알고 있다. 아들에게 슬쩍 산에 가자고 운을 떼어 본다. 물론 산에 가면 컵라면을 사 주겠다는 말도 슬쩍 덧붙인다. 아들은 예상대로 선선히 그러자고 한다. 역시 우리 아들은 아직 순진하다. 아내가 등산 배낭에 물과 간단한 과일, 수건 등을 챙겨준다.

 

집에서 가까운 산은 불암산과 수락산이 있다. 두 곳 모두 가끔씩 가는 곳이다. 불암산은 정상까지 2시간 남짓이면 되고, 수락산은 넉넉잡아 3시간이면 가능하다. 집에서 나와보니 날씨가 너무 쌀쌀하다. 산에 가면 더 추울 것 같다. 집에서 더 가깝고 정상까지 가는 시간도 적게 걸리는 불암산으로 가기로 했다.

 

거의 2달 만에 하는 산행이다. 산에 오르기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발이 너무 무겁다. 차가운 공기에 숨이 차기 시작한다. 젠장, 운동 안 한 티가 너무 난다. 슬쩍 돌아보니 아들 놈도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힘드냐’고 물으니 너무 오랜만에 산에 와서 조금 힘들다고 한다. 아빠 체면에 힘든 척은 못하고, 조금만 더 올라가서 쉬자고 하고 계속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 30분쯤 오르자 이제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슬쩍 아들 녀석과 눈을 맞추자 아들이 조금만 쉬어가자고 한다. 못이기는 척하며 그러자고 했다. 배낭에서 귤을 하나씩 꺼내어 입에 물고 위를 쳐다보니 오늘따라 정상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날씨도 춥고 그냥 내려가고 싶은 유혹도 밀려온다. 아들도 상당히 힘들어 하는 것 같으니, 아들만 동의하면 그냥 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슬쩍 아들의 의사를 물어보니, 컵라면을 먹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계속 올라가겠다고 한다. 어쩔 수 없다. 계속 올라가기로 하고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상하게 오늘은 정말 힘들다. 너무 오랫동안 산에 오르지 않은 탓인가 보다. 몸은 이렇게 정직하다. 산에 자주 오를 때에는 전혀 힘들지 않았던 코스인데도 오늘은 무척 힘들게 느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가다 보면 분명히 정상이 온 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땅을 보며 한 걸음씩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이것이 등산의 묘미인 것 같다. 힘들게 느껴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더해져서 어느덧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주니 말이다.

 

어느덧 정상이 눈 앞이다. 아들이 기다리는 컵라면 파는 곳은 정상 밑 봉오리 위에 자리잡고 있다. 라면 파는 봉오리에서 정상까지는 큰 바위들이 자리잡고 있어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바위 옆에 매달린 밧줄을 잡고 정상까지 올라 가야 한다.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장갑을 준비하지도 않은 상태라 아들이 밧줄을 잡고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약간 불안하다. 평소보다 휴식을 많이 취한 탓인지 벌써 산에 오른 지 2시간이 넘었다. 아들에게 컵라면이나 사주고 그냥 내려가고 싶다.

 

아들에게 컵라면 먹고 내려가자고 한다. 아들도 많이 힘들어 했으니 그러자고 할 줄 알았다. 아들은 뜻밖에 정상까지 오른 후에 내려와서 라면을 먹겠다고 한다. ‘힘들지 않냐’고 했더니, 힘들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정상까지 가보겠다고 한다. 아들이 컵라면 때문에 산행에 따라 나선 줄 알았는데 내가 아들을 오해 했나 보다. 갑자기 아들이 부쩍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어린 아이인줄 알았는데 벌써 이만큼 컸구나.’ 대견한 생각이 든다.

정상이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장관이다. 산 정상에서 보이는 세상은 언제나 고요하면서 실제 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아들에게 ‘좋으냐’고 하니 좋단다. ‘뭐가 좋으냐’고 하니, 그냥 좋단다. 그렇다. 산 정상에 서면 그냥 좋다. 산 밑에 있을 때 품고 다니던 고민거리도, 스트레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좋다. 그냥 좋은 이 느낌을 잠시 느끼기 위해 우리는 정상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컵라면을 파는 곳까지 내려와서 약속대로 아들에게 컵라면을 사주었다. 나는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 아들을 바라본다. 앞으로 아들은 현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수 많은 산들을 올라야 할 것이다. 오늘 보다 훨씬 힘든 상황이 많겠지만, 꿋꿋이 잘 오를 수 있길 기원해 본다.

산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누군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오르면 내려와야 하는 곳이 산인데 왜 그렇게 힘들게 올라 가냐고? 그 때는 대답할 수 없었는데,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르면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산에 오르는 거라고. 산에서 내려와야 또 다른 산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힘들게 산을 오르는 경험을 많이 할수록 더 높은 산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